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의지/선수 경력 (문단 편집) == 아마추어 경력 ==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부 부장 선생님이었던 담임선생님의 제안을 받고 야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부친이 야구팬이어서 야구 관람도 자주 가고 동네에서 야구도 자주 했었다고 한다.[[https://youtu.be/zzS90N16LcY?t=223|영상]] [[진흥고등학교 야구부|광주 진흥고]]에서 정확한 송구 능력과 장타력이 돋보이는 타격으로 나름대로 촉망받는 포수였다. 하지만 동작이 굼떠 프로에서 크게 성공하기는 힘들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진흥고 3학년 당시 고향팀인 KIA에서 '대학에 진학하면 졸업 후 데려가겠다'라는 조건부 제안을 했으나, 고교 졸업 후 바로 프로 진출을 생각했던 양의지는 2006년 드래프트에 본인을 지명한 두산에 입단. 당시 '내가 왜 그래야 하지?'라 생각했다고 한다. 양의지의 회고에 의하면 고향팀에 입단하고자 KIA와 먼저 접촉했으나, 당시에는 KIA 구단이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탓에 계약 문제에 있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선수와 팀의 궁합을 생각하면 자신은 두산이 잘 맞고, KIA에서는 성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양의지는 프로 입단 이후 포수로서 스승을 잘 만났기로도 손에 꼽힌다. 타격에서는 경찰청 시절 [[유승안]] 감독이 작정하고 만졌고, 수비에서는 두산 배터리 코치로 [[강인권]](현 NC 감독)과 [[김태형(1967)|김태형]](전 두산 감독)을 만나 호되게 굴렀다. 여기에 본인의 재능과 노력이 합쳐져 제대로 꽃을 피운 것이다. KIA에 갔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말은 실제로도 과장이 아닌 셈이다.] [[http://sports.media.daum.net/v/20160614140942061|기사]] 2006년 신인지명 당시 두산 구단에서도 주전 포수 [[홍성흔]]의 부상이 잦아지면서 포수 뎁스를 채워놓자는 의미에서 하위 라운드에서 지명했다. 따라서 팬들 역시 큰 기대는 갖지 않았고 당시 1차 지명자인 [[남윤성(야구)|남윤희]]의 계약 여부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